[복지시론]바람 꼬리가 길어지는 가을 날 -박혁종 본지 논설위원

하늘이 이렇게 높다는 것도, 햇살이 이렇게 투명하다는 것도, 대도시가 아닌 소도시에 사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일이라는 것도 가을 아침에는 알게 되었다. 가을 아침은 내게 스승이다. 그 전에는 몰랐던 것들을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가을 아침, 베란다에서 바라본 하늘과 잘 정리된 집들 그리고 길은 어디 하늘의 소식들이 폴폴 날아와 내게 앉는 것만 같다. 너무 집착하지 말고, 너무 성내지도 말고, 그냥 바람처럼 구름처럼 살라고 한다. 세상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하늘의 소식을 가을 아침이면 이렇게 쉽게도 만난다.
해가 돋아 동쪽 산마루에 머무는 동안 나는 햇살을 온 몸으로 받으며 따사로운 기운을 받는다. 어쩌다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가슴이 설레어 눈을 감기도 한다. 같이 사는 아내가 차나 한잔 하자는 말에 눈을 뜨면 가슴에 일렁이던 추억들이 소리 없이 빠져 나가고는 한다.
아내와 마주 앉아 발이 넷 달린 2인용 식탁에서 차를 내리면 차 따르는 소리가 마치 별들이 하늘을 구르는 소리만 같다. 가을 밤 하늘에 빛나는 풋 별의 냄새를 알고 싶어 하던 시인에게 나는 가을 아침에 마시는 차의 향기를 건네고 싶다. 가을 밤 풋 별의 냄새와 가을 아침 차향은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아파트 청소 하시는 한 분이 올라와 나를 부릅니다. “아저씨…” 얼굴에는 주름이 겹겹이다. 반갑다고 웃는 그 얼굴에 가을 햇살이 잔뜩 내려앉았다. 주름 골골이 햇살로 가득 채워져 그 웃음이 더욱 빛난다. 벽에 걸어둔 신문함이 바람에 떨어졌다고 알린다.
가을 아침 햇살 받은 아파트는 참 착하다. 이 아파트에 머무는 사람들도 한없이 착해진다. 청소 아주머니가 내려가고 나는 신문을 펼쳐들고 조용한 식탁 위에서 나는 황제의 자리를 버리고 한 벌 옷으로 만족하며 자리로 돌아간 순치황제의 마음을 만난다. 세속의 백년이 가을 아침 하루 낮만 못하다던 그 깨달음이 손에 잡히는 것만 같다.
햇살은 투명하고 바람은 맑은 가을 아침에 나는 한없이 착한 사람으로 태어난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공생하는 연기적 존재다. 나와 네가 둘이 아닌 공심공체(d뎒�인 것이다. 혼자서만 잘 살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없다.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분리된 ‘나’라는 것이 있다면 모르지만 그것은 허상이 아닐까? 나보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 그 마음이 마침내 온 우주와 함께 하는 한마음인 것 같다.
얼마 전 20대 청년이 자신을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잃은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성우 지망생이었던 안모(28)씨는 당시 화재를 가장 먼저 감지하고 빠져나와 119에 신고했다. 그렇지만 늦은 시간에 잠들어있는 이웃들을 깨우기 위해 다시 건물로 들어갔다고 한다. 모든 층마다 초인종을 누르고 “불이 났어요! 나오세요!”하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다 정작 자신은 빠져나오지 못하고 질식해 사망하게 된 것이다. 안 씨 덕분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사했다.
사실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지만 안 씨처럼 소리 없이 남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사람다운 사람들이 많다.
인도의 지도자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변호사로 일할 때의 일화를 옮겨보면 어느 날 간디는 기차를 타고 업무를 하러 가게 되었는데 이제 막 떠나는 기차에 도착하여 기차 발판에 오르려는데 그만 한쪽 신발이 벗겨져 기차 밖으로 떨어졌다.
기차는 이미 출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신발을 주울 수 없었던 간디는 신고 있던 한 짝 신발을 떨어진 신발 옆에 던져놓았다.
함께 있던 친구가 몹시 의아해하면서 물었다. “왜 나머지 신발을 벗어 던졌는가?” 그러자 간디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기를 “누군가 저 신발을 줍는다면 두 쪽이 다 있어야 신을 수 있지 않은가.” 누군가에게 부족한 게 내게 있다면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이다.
영롱하고 찬란한 잊을 수 없는 가을 아침에 작은 것이라도 상대방을 배려하는 의인 안 씨와 간디의 마음을 보면서 하나를 가지면 또 다른 하나를 가지려고 온갖 욕심을 부리는 현대인들에게 이들이 뿌리고간 크고 작은 감사의 홀씨가 우리들 마음속에서 자라주길 함께 기원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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