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시론] 산불 이재민, 봄 같지 않은 봄

박혁종

본지 대표

눈보라 휘몰아치고 칼날 같은 추위 속에서는 지난봄이 올 것 같지 않은 봄이 어느새 도둑처럼 슬며시 곁에 있다.
아파트 작은 뒷산 언덕에서 겨우내 까마귀 떼와 까치 떼가 몰려다니며 울어 대는 소리가, 말 그대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자리에, 이제 잘 보이지 않던 새들이 어느 날 나뭇가지 사이에서 분주하고, 조금 떨어진 논두렁이 개울가에서는 개구들의 요란한 울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소리가 힘차게 들리는 것을 보니 올챙이 새끼들을 낳았나 보다.
바다는 어떤가. 갈남리 작은 마을 소포에서 친구가 작은 엔진 달린 배를 타는 어부인데, 요즘 간혹 바다에 쳐 놓은 그물에 도다리가 잡힌다고 한다. 그 친구의 말에 의하면 봄철 바닷사람들은 도다리쑥국을 먹어야 봄기운을 얻는다고 언제 한번 들려서 맛보고 가란다. 감사한 말이다.
이 뿐인가. 식탁에 올려 진 냉이찌개 달래 같은 나물 속에서 봄을 맛보기도 하며, 유채꽃 산수유 개나리 같은 꽃에서 봄빛을 보고 있다. 온갖 생명이 꿈틀거린다. 그 약동하는 힘이 무엇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밖에 없다. 사랑은 생명을 고양시킨다.
하지만 지금 고성, 속초, 인제, 강릉, 동해 등지에서 지난 4월 4일부터 사흘간 축구장(7천140㎡)의 742배에 달하는 산림을 잿더미로 변하게 했던 강원산불로 귀중한 생명을 비롯한 주택 등을 잃은 이분들의 한숨은 이루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고통 받고 있으니 춘래불사춘 (春來不似春)이라 했던가요? “봄이 왔으나 봄이 오지 않았다”라고도 할 수 있다.
지금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실천해 보이는 것이다. 이들이 우리들과 같은 현재의 삶을 바란다면 내가 먼저 무엇을 도울 것인가를 생각하고, 내가 먼저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건네는 것이다. 세상은 다음 세대의 거울이라고 하지 않던가? 우리들의 이런 모습 속에서 사회는 자연스럽게 학습이 되고 또 이를 실천하게 될 것이다.
난 오늘 그들을 돕겠다는 생각을 늘어놓지 말고 나부터 행동으로 보일 것을 다짐해 보면 좋겠다. 성금도 좋고, 위문품도 좋지만 ‘말로 가르치는 자에게는 대들고 몸으로 가르치는 자에게는 따른다. “이언교자송 이신교자종(以言敎者訟, 以身敎者從.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라고 하였으니,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소득과 분배의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보면서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고 했던 어느 드라마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너의 고통을 내가 진정으로 공감하고 함께 아파했기에 가능한 표현이다. 조선시대 성군(聖君)으로 알려진 정조(正祖)도 위와 같은 말을 했다. 백성들을 자식처럼 생각했기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이다.
나라 다스리는 위정자를 왜 ‘백성의 부모’라고 불렀을까? 그것은 아마 모든 부모가 자식을 자기 몸보다 더 사랑하고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정치인들도 백성들을 그렇게 보고 있을까? 만일 정치인들이 ‘백성의 부모’라는 자세를 가지고 정치를 한다면 아무리 절망적인 재난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다시 일어서기는 시간 문제일 것이다. 애민 군주(愛民君主) 정조의 자세를 오늘날의 정치인들은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정부와 여야는 초당적으로 이재민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나누어야 한다. 정치는 말로 하는 게 아니다. 행동이다.
예로부터 식자들은 위정자를 향해 민심을 위배하지 말라는 경고를 끊임없이 해왔다. 어찌 보면 민심을 얻어야 한다는 이러한 충고는 위정자들을 향해 던지는 상투적인 경계에 지나지 않다고 여겨질 수도 있지만 최한기가 『인정(人政)』에서 “대개 백성은 국가에 의지하고 국가는 백성에 의지한다. 오직 백성과 국가가 서로 의지하여 살아가야 하니 어찌 백성을 망각하여 그들에게 의지할 데가 없도록 만들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듯이 국민과 국가가 서로 의지하며 상생하는 관계를 중시하였고, 이런 관계를 유지하는 밑거름은 바로 민심을 얻는 것이므로 그저 내뱉는 상투적인 경계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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