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삶의 끝자락에는 죽음이 있는 이유가 있다

박혁종

본지 공동대표

간밤 꿈속에서 돌아가신 부친을 뵈었다. 내 나이 여덟 살(8) 때라지만 확연한 사실이 부분부분 세상을 하직한 아버지의 상여 길을 배웅한 기억이 있다. 텔레비전에서 지지직거리는 흑백필름 장면처럼 흐릿하면서도 또렷하다. 내 아버지가 안 계시는 세상도 이렇게 잘 돌아가고 있다.
반세기를 훌쩍 넘어서 인지 그 슬픔을 아는 이는 나와 몇몇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움으로 남아있을 뿐, 삶의 끝자락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는 철저한 야박한 인생사다.
이러하듯 엊그제 같았던 기억들이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갈 세상을 생각하면 허망하여 눈시울이 뜨겁다. 필자가 살아있음이 증명된 이 하루, 감사해야 할지 앞으로 겪어야 할 일들에 소름 돋는다.
하지만 곰곰이 따져 내게 물어보면 ‘삶’은 ‘죽음’이란 사건을 끝으로 비로소 막을 내린다는 것으로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은 어차피 겪어야 할 일들은 겪어야만 하는 것이 나만이 아니라는 진리에 안도감이 든다. 그렇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늘 삶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다만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인생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것이다. 주어진 조건과 환경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더 큰 화를 입을 뻔 했는데도 이 정도로 그친 것, ‘그래도 그만하기 다행이다’라는 생각으로 내 인생을 다채롭게 바꾸기로 해보자.
6월, 한 해 중에 얼마 안 되는 빛나는 계절이 아니던가. 산천에는 보는 이들을 유혹하는 온갖 꽃들이 피어나고, 동해안의 빛나는 햇살, 부드러운 바람이 있는데 어찌 삶에 대한 경이로움을 느끼지 않을까.
한데 사람들이 사는 사회 아무리 복잡하고 다양하다고 할지라도 신문과 방송 인터넷 각양각색의 언론 등은 저 마다의 색깔로 24 시간도 모자라는 듯 재탕 삼탕을 앞 다투어 내보낸다. 시민은 피곤하다. 국민은 고통스럽다. 그 얼굴 그 얼굴 패널들은 세상사 모두를 섭렵한 것 같은 자신감(?)으로 내편 네편 나누어 핏대를 올리며 주제에 올려놓은 자기와 같은 사람들을 향해 “잘하느니 못하느니 잘못했다, 잘하고 있다”는 등등 절대 평가의 주인처럼 개 목걸이를 채워 이리저리 끌듯 하는 행태가 안쓰럽기까지 하다.
그들은 내 행동의 본질보다는 남들의 평가에 마음을 더 많이 쓰는 것 같다. 자신들의 판단이 정확한지 따지고 스스로 평가를 하기 보다는 작은 칭찬이나 비판에 우쭐대거나 우울해 한다. 사람은 인정욕구를 가진 사회적 동물인지라 남들의 평가와 인정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내가 가진 것, 성취한 것 이상으로 타인이 나를 높게 평가한다면 어떨까? 당장은 기분이 좋을지 몰라도 헛된 명성만 높아가는 불안함 속에서 살지 않을까? 떳떳함과 당당함은 정당한 자기평가에서 나오는 것이다.
온갖 미사여구로 자신을 치장하는 것보다는 당당하고 뚜렷한 자아를 만드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사람이 사람을 논평한다는 것은 자신만이 간직하는 비밀이다. 맹자는 말하기를, “남을 사랑하는데도 가까워지지 않거든 자신의 사랑을 돌이켜 보고, 남을 다스리는데도 다스려지지 않거든 자신의 지혜를 돌이켜 보고, 남을 예우하는데도 반응이 없거든 자신의 자세를 돌이켜 보라. 어떤 일을 행하고서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으면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자신에게서 그 원인을 찾아보아야 한다”라고 했다. 어디 맹자만 그랬겠는가. 모든 성현이 남을 탓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고 하였다. 자신의 입장만을 고집하기 전에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라고 하였다.
상대방과 경쟁하면서 각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인간 사회다. 이러한 인간 사회에서 살아가다 보면, 대립과 반목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대립과 반목이 일어나지 않는 사회는 소설 속에서나 있는 이상 사회지, 현실 사회는 아니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대립과 반목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면서 상대방을 배려해 본다면, 상당 부분 줄어들 수 있다.
그 모든 일은 대부분 나의 잘못으로 인해 일어나는 것이다. 반성해야 할 것투성이의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삶을 살아온 것이다. 남들이 이 글을 읽고 각자가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보기를 바라기에 앞서, 나 자신부터 반성하고 질책 할 것이다. 죽음이 있다는 것은 공생공존과 존중을 다 하라는 의미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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