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장애인복지신문’ 창사 2주년 100만원 고료 장애인생활수기공모 ‘최우수상’ 당선작

무제

전화연

2016년 9월. 몇 달 만에 만난 조카에게
“이제, 이모 배속 치카치카 안 해도 된다!” 라고 말했더니,
“왜? 나랑 더 많이 놀아 주려고?” 라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귀여운 아이 얼굴을 보고, 어른들은 흐뭇한 미소와 함께 코끝이 찡한 감동을 느꼈다. 나도 나를 올려다보는 아이얼굴이 너무 예뻐 꼭 껴안으며 행복의 미소를 지었다.
때는, 바야흐로 1990년 초등학교 3학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는 자가 면역질환인 루프스로 인해 강릉에서 원주를 오가며 치료를 받았다. 그 질환은 여러 가지 특징을 가진 염증 결합 조직의 질병으로 쉽게 말해, 내가 나 자신을 공격하는 질환이다. 내 몸의 조직이나 기관이 공격을 받으면 염증과 손상을 가져오게 되고, 염증반응이 일어난다. 그 공격이 활성상태가 되면, 내 몸에 문제가 발생하여 집중적 입원치료를 받게 되고, 비교적 안정적 상태로 접어들면 정기적 통근치료와 약을 복용하게 된다. 그러므로 결석한 날이 많기는 했지만, 학교는 다 마칠 수가 있었다.
하지만 늘 주눅들어있는 나는 병원가기 전날엔 낼 병원 가는 날이라, 결석해야 한다는 말조차 선생님께 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결석을 하고 다음날 학교에 가면, 몰라서 못 챙긴 준비물과 숙제들로 또다시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선생님께 이런 이유로 결석을 하여, 준비 못하였다고 말씀 드리면 쉬운 일인데, 어렸던 그때는, 교실 한가운데 서서 말하는 것이 너무나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또한 입원치료로 새 학기가 시작 되도 학교에 못가고, 뒤늦게 새 교실에 들어가는 날은, 정말로 제일 학교에 가기 싫은 날 중 하루다. 왜냐하면 친구들끼리는 벌써 친해지기 시작하면서 교실은 왁자지껄 신난 분위기인데, 나는 홀로 그곳을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낯선 나를 향해 경계의 시선을 보내고, 또 서로 수군거리며 나를 쳐다 볼 교실 속으로 말이다. 나는 얼굴을 들 수도, 손가락하나 까딱 할 수 없는 최대한 움츠린 상태로, 교실 문 가까이나 비어있는 맨 끝자리 정도에 앉아 있을 것이다. 담임선생님께서 오실 때 까지는.
그렇게 대범하지 못하게 초등4년을, 그리고 중학교3년과 고등학교3년을 더 보냈던 것 같다.
당연히 친구도 많지 않았던 나는 어떨 때는 같이 밥 먹을 친구가 없어 점심시간을 화장실에서 보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몸이 아파도, 용기 내어 친구들에게 먼저 말도 걸어보고, 결석한 날의 부족함을 씩씩하게 채워 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아마 나는 내가 부족하기에, 먼저 손 내밀고 진심을 보이면 안 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조금이라도 힘을 내어 먼저 다가가 학교생활을 충분히 즐길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당시, 소심하고 겁이 많은 나에게서 헤어 나오는 일이란 우주를 탈출하는 것만큼 불가능한 일이었다. 주눅들어있는 나는 그랬던 것 같다. 물론, 가끔은 먼저 다가와 다정하게 손을 내밀어 주는 친구들도 있었다. 숙제를 가르쳐 주거나, 내가 아플 때 선생님께 그 사실을 대신 알려주는 등 정말 많은 도움을 주는 친구들이었다. 그러면서 함께 이야기를 하고 점심을 먹으며 친구가 되어주었다. 많지는 않았지만, 그런 친구들이 있어 그 힘든 시간을 조금은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몇 학년 때인지는 모르겠으나 겨울방학이 다가올 무렵, 학기말 시험을 앞두고 있었는데, 시험을 못보고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퇴원 후, 집으로 돌아 왔을 때 담임선생님과 같은 반 아이 두 명이 다녀갔다고, 아빠가 말씀해 주셨다. 그러면서 학기말 시험지 뭉치도 함께. 학생에게 시험지를 받는 것은 긴장과 두려움 그 자체이다. 하지만 그때, 나에게는 감동이었다. 물론, 처음이자 마지막일이지만.
그렇게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을 무렵, 강릉에 비교적 큰 종합병원이 들어서게 된다. 내가 고등학생 때는 이쪽으로 옮기면서 결석을 하지 않고 외래를 다녔다. 그런데 고3때쯤, 한창 공부할 시기인 그때 주사치료를 받게 된다. 주사약의 명칭은 정확히 모르나, 결석 안하고 외출증을 끊고 병원에 가서 1~2시간 링거주사를 맞고 오면 된다. 주사를 맞는 과정은 비교적 쉬웠으나, 맞은 후에 후유증이 엄청났다. 몇 시간이 지나면 속이 매스껍고 울렁거리기 시작하는데, 그 상태가 며칠이나 지속되고, 견디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속이 거북할 정도이다. 그 주사가 항암치료제의 일종인데, 그 중에서도 비교적 약한 단계의 약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그 정도로 힘들었는데, 막상 항암치료를 받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지…….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만 봐도, 그때 생각이 나서 정말 내일처럼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 힘든 주사는 고3때 1차 치료를 시작으로, 대학교를 마칠 무렵 2차 치료가 다시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몇 년이 지나도, 속을 뒤집어 놓는 후유증은 여전했지만.
그렇게 제일 힘들었던 링거주사중 하나로 각인된 그 치료는 아마도 내가 투석이라는, 내 삶에서 가장 고달프고도 힘든 가시밭길로 들어가는 서막을 알리는 경종 이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루프스 진단을 받은 초등3학년 때부터 대학까지, 그 시간동안 다른 질환들은 치료하고 진정되고를 반복하며 버텨왔지만, 그 중 신장질환은 회복의 기미 없이 조금씩 기능이 떨어지면서 마지막 단계까지 봉착했기 때문이다. 결국, 졸업 후쯤에는 투석을 해야 한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듣게 된다. 그것은 마치 사형선고와도 다름없었다.
투석은 신장기능을 대신해 주는 치료이다. 신장회복을 위한 치료가 아닌, 인공신장의 역할만을 한다. 투석에는 혈액투석과 복막투석 두 가지가 있다. 혈액투석은 팔의 내측에 동맥과 정맥을 연결하여 만든 동정맥루를 통해 혈액투석장치를 이용하여, 그리고 복막투석은 복부에 관을 삽입하여 이 관을 통해 투석액을 주입하고 배액함으로써, 체내 노폐물과 수분 등을 제거하여 신장의 기능을 대신한다. 혈액투석은 일주일에 2~3번 병원에 내원하여 4시간씩 누워 있어야 하고, 복막 투석은 하루에 4번씩 한 번에 약40분정도가 소요된다.
지금 내가 이렇게 투석을 글로 적어가며 설명하는 낯선 경험을 하다 보니, 정말 간략하고 마치 별것 아닌 것 같은 생각에 섬뜩한 기분마저 든다. 내가 10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겪었던 투석은 단어조차도 떠올리고 쉽지 않은 떨쳐버리고만 싶은 기억들뿐인데 말이다.
오롯이 그 방법대로만 이루어진다 해도 어려운 투석은, 온갖 부작용과 합병증, 그리고 복잡하고 어려운 식이요법으로 또 다른 고달픔은 말할 것도 없이 힘겨운데 말이다.
암튼, 단 몇 줄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 투석을 해야 한다는 선언은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고, 얼마간의 치료가 아닌 인공관을 달고 언제까지고 해야 한다는 설명은 마치 사형선고와도 같았다. 어찌 보면, 시한부 선고는 아니니 사형선고는 아니고, 어쩌면 무기징역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순전히 지금 마음이 편해진 상태에서 드는 가당치도 않는 이야기지만 말이다. 하지만 당시 끝도 안 보이는 그 길을 가야한다는 말은, 죽음에 이르는 말과 동의어 그 자체였다. 정말, 시한부가 아닌 인공적인 방식이지만 치료가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음에도, 그때는 온통 절망적이고 비관적인 생각들뿐이었다.
2004년 24살에, 나는 복막투석을 시작하기에 된다. 집에서 매일 하루 네 번씩, 일정한 시간간격을 두고 일어나자마자, 오후, 저녁, 자기 전에 이렇게 4번을 하루도 빠짐없이 말이다.
투석을 시작하면서 신장장애2급이라는 장애 판정도 받게 된다. 장애라는 소리에 또다시 충격을 받을 만도 했지만, 첫 번째 공격에 이은 두 번째 공격에는 그저 먹먹한 느낌이 들었다. 투석이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 ‘장애판정을 받을 만큼 엄청나게 힘든 일이구나’ 라는 그 생각만이 가득했던 것 같다.
복막투석의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주변 환경 및 개인의 위생이다. 복막에 삽입된 관과의 연결과정에서 발생 할 수 있는 위험요소들을 미연에 차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위생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주변을 깨끗이 하고, 문을 닫아 외부로 부터의 먼지 등을 차단하고, 본인은 손을 깨끗이 씻고 마스크착용을 하는 등등.
그래서 퇴원을 하면서, 더 외진 곳으로 이사를 갔다. 아버지는 중고가구점을 운영하고 계셨는데, 나로 인해 이사를 하게 되면서 가게와 집을 오가는 시간이 1시간 반이나 걸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출퇴근 시간만 3시간이 걸렸다. 엄마는 그동안 가게 일을 도왔는데, 이사를 하면서 가게를 나가지 않으셨다. 그래서 내 몸이 조금 회복되면 엄마도 아버지를 따라 출근을 하실 줄 알았다. 왜냐하면 얼마 후에는 나의 건강상태가 혼자 끼니를 챙겨 먹을 정도는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게에 나가셔도 되었을 텐데, 엄마가 보기에 생기 없고 무기력한 나를 혼자 둘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시내로 다 같이 이사를 나오기까지 일 여년이 걸렸는데, 그때까지도 엄마는 계속 내 옆에 있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그곳에서의 시간은 절망과 나락, 우울과 혼란 그 자체였다. 그래서 병원 가는 날 빼고는 집밖에 나오지도 않은 채, 하루하루를 그저 살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가족들도 그동안 일상을 보내고 있는 듯 보였지만, 사실은 모두 내 옆을 든든히 지켜주고 있었다. 아버지는 시골집의 내방을 투석하기 편리하게 수리해 주고, 어떤 불편함도 없게 집안구석구석을 신경써주었으며, 매일 출퇴근시간에 3시간이 넘는 피로를 견디셔야 했다. 엄마는 집에서 끝도 없는 집안일들을 하면서, 나를 보살펴 주셨다. 하지만 엄마에게는 그것도 고단한 일이지만, 가게 나가서 활기차게 장사도 하고 사람들도 만나야 하는데, 온종일 집에만 있는 것 자체도 엄청 고역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워낙, 집에 종일 계시는 분이 아니셨다. 오전에 집안일이 끝나면, 오후에 가게 일을 도우시고, 저녁에는 종종 친구 분들과 맛있는 것을 먹거나 수다 떠는 것을 무척 좋아하셨다. 그런 엄마가 친구들과 동 떨어진 시골에서 하루 종일 나와만 있었던 그 일상은, 저녁만 되면 대문 밖까지 나가 아버지가 오시기만을 고대하게 만들었다.
당시, 나는 내 생각 속에만 갇혀 있었는데, 지금 그때를 생각하면 코끝이 찡해지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렇게 아버지와 엄마의 보살핌이 있어, 내가 그 힘겨운 시간을 버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나에게는 두 살 터울 언니가 한명 있었는데, 그때 언니는 일자리 때문에 서울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주말이면 먹고 싶은 것이 없냐며, 아이스크림이며 케이크, 초콜릿 등을 사갖고 왔었다. 주말이면 평일에 못했던 밀린 낮잠부터 할 일이 수두룩했을 텐데도, 한주 걸러 한번은 꼭 맛있는 간식거리를 잔뜩 사들고 왔었다. 가족들의 그런 살가운 보살핌과 지극한정성덕으로 나도, 조금은 힘을 낼 수 있었다. 일 여년 정도가 지났을 무렵에는, 다시 시내로 나와 살게 되었다. 그것은 단지, 마음의 안정을 찾을 준비가 된 정도였지, 투석은 여전히 적응중인 상태로 시간은 흘러갔다.
20대이니, 무엇이라도 해보겠다고 애쓰면 몸이 지쳐 병원에 입원을 하고, 다시 회복 후에는 복막시간을 피해 시간제 알바라도 할라치면, 또 합병증으로 다시 병원 행이다. 어느 날은 자면서 섧게 흐느끼다가, 울음소리에 내가 놀라 잠을 깬 적도 있었다. 그 힘겨운 시간들을 어찌 다 표현 할 수 있겠냐마는, 그 시간 중에서 행복했던 순간도 있었다.
바로 2008년 언니의 결혼이었다. 결혼식은 겨울에 올렸지만, 그 한해는 내내 즐거웠던 것 같다. 다만, 그해 초에 배속에 연결된 도관을 교체하는 시술이 있었지만. 도관 주변에 염증이 생겨, 빼고 다시 넣는 시술인데, 전신마취가 아니라 부분 마취라 큰 수술은 아니지만, 내 살과 완전히 붙어버린 도관을 뜯어내는 일은, 말 그래도 살을 찢는 고통 그 자체였다. 부분 마취를 했음에도 도관을 제거할 때는 너무 아파 소리 지를 여력도 없이, 식은땀만 나고 꽉 진 주먹이 나중에 얼마나 아팠던지 지금도 생생하다.
2008년은 고통의 시간으로 시작했지만, 봄에는 형부 될 사람이 인사를 왔다. 나는 벌써 서울에서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든든해하며 흐뭇한 미소를 연신 지으시며, 여러 좋은 말씀을 해 주셨고, 물론 우리는 지루함감이 없지 않았지만. 엄마는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식사 후에는 꽃구경을 가자며 소녀처럼 신나하셨다. 그리고 여름이 지나, 시댁 사정상 겨울에 날짜를 잡았다. 그해 가을에는 엄마랑 나는 결혼준비에 필요한 것들을 장만 하는 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리고 다음해 가을 언니의 임신소식과 함께, 2010년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정말, 생명의 탄생은 축복과 감동 그 자체이고 모두의 행복과 기쁨이었다. 언니부부에게는 첫아들이요, 부모님에게는 첫 손자이고, 나에게 또한 첫 조카였다. 아이의 요목조목 귀여운 눈, 코, 입과 앙증맞은 작은 손과 발은 보고만 있어도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언니부부는 아이를 강릉 집에 맡기고, 주말에만 아이를 보러 내려왔다. 1년 정도 후에 서울로 데리고 갔지만, 그 시간동안 엄마랑 내가 키웠기에, 아이에 대한 애정도 갑절로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는 단지, 엄마의 보조역할 뿐이었지만. 언니 네가 오는 날이면, 엄마도 조금 쉴 수 있어서 좋고, 나도 언니를 볼 수 있어서 좋다. 하지만 제일 불편한 것이 하나 있다. 우리 집에 방이 두 개 뿐이라, 나는 안방에서 자고 언니 네가 내방에서 잠을 잔다. 내방을 뺏겨서 불편한 것이 아니라, 바로 투석 때문이다. 내가 투석을 하루 4번을 하는데, 그 첫 번째 투석은 일어나자마자 한다. 왜냐하면 배속에 들어간 투석 액을 8시간이상 저장하면 몸속으로 재흡수 되므로, 일정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배출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기상과 동시에 전날 밤에 들어간 투석 액을 빨리 배액 해야 한다. 또한, 첫 투석 후에 최소 4시간 후에 두 번째 투석을 해야 한다. 그러니 첫 번째를 얼른 해야, 자기 전까지 일정시간을 두면서 3번을 더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들로 나는 기상 후에, 투석 할 준비가 되어 있는 내 방에서 모두를 내보내고 문을 닫고 일을 진행해야 하는데, 곤히 잠들어 있는 형부를 깨우는 일은 여간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것이 눈꺼풀이라면, 나에게 세상에서 제일 미안한 일은 아침마다 형부를 깨우는 일이었다. 남들이 보기에 잠 한번 깨우는 일이 무엇이 대수냐고 생각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꼭 이것 한가지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일상생활이 나의 투석활동을 중심으로 바뀌게 된다. 아픈 나의 치료활동을 위한 것이므로 무조건으로 양보를 하는 것인데, 그것에 대해 가족누구도 절대 불만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불편한 것은 불편한 것이고, 내가 미안한 것도 어디가지 않는 사실인 것이다.
물론, 나도 너무 아플 때는 신경질도 내고, 나에게 너무 무신경하고 본인들의 볼일만 보면 섭섭한 마음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또 나를 위해 양보하고 배려해 주면,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 모든 마음이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불편함을 감수하며, 서로 이해하고 감싸주는 상황 속에서, 우리 모두를 총체적난국에 빠지게 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바로 아이의 존재였다.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랑하는 나의 조카 하늘은 매일매일 잘 자고 잘 먹으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는데, 기어 다니기 시작하면서는, 내가 투석을 하러 방에 들어가 문을 닫으면,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나를 찾는다. 심지어 심할 경우는 울기까지 한다. 하늘은 지금도 그렇지만, 사람을 좋아하고 정이 넘치는 아이다. 그래서 엄마랑 아빠가 옆에 있어도, 앞에는 이모가 있어야 하고, 뒤에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있으면 더 좋아하는 아이다. 그러니, 나랑 놀다 내가 없어져도 나를 찾고, 주말에 온 엄마랑 신나게 놀다가도 내가 슬그머니 없어져 문을 닫으면, 문 앞에서 엉엉 운다. 그러면 방에 있는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밖에서 지켜보는 가족들도 진땀을 빼고 만다.
나는 투석할 때, 투석 액의 관과 배속의 관을 한번 연결하면, 다 끝날 때까지 밖에 나갈 수가 없다. 그러니 어른들의 경우, 내가 방에 들어가면 방에 들어올 일이 있어도 기다림을 감수하고, 안에 있다가도 내가 투석 할 시간이면 나가야 하는 등, 자고 있어도 예외는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 던져져서, 아무것도 모르고 문을 두드리거나, 심지어 울기까지 하는 아이를 보고 있으면, 안쓰러운 마음이 그지없다. 또한 나는 지금 뭐하고 있나 싶은 생각에 눈물이 난 적도 있었다. 그래도 애면글면 하던 일을 끝까지 마쳐야 한다.
이렇게 진땀이 나는 상황 속에서도, 애잔한 마음과, 한탄스런 내처지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흐르고 고맙게도 하늘은 건강하게 잘 자라 주었다.

하늘은 기어 다니기 시작하더니 금방 설 수 있게 되었고, 서고 나서는 조금씩 발을 뗄 수도 있게 되었다. 모두 둘러앉아 아이가 발을 떼는 모습을 보며 환호하고 박수치던 일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뿐만 아니라, 옹알이를 시작하면서 알아듣기도 힘든 말을 한마디씩 할 때는 어찌나 귀여운지, 한번이라도 더 듣고 싶어 연신 말을 걸었던 순간도 생각난다. 하늘이가 말을 조금씩 하면서는 말귀도 알아듣는 것 같았다. 여러 번 설명을 해야 했지만, 위험한 것을 설명하면 피하기도 했고, 어떤 것이 더 좋은지 물으면 반응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그래서 내가 투석을 하려고 방에 들어 갈 때, 충분히 설명을 하면 최소한 엉엉 우는 상황까지는 초래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설명하는 부분에 있었다. 높은 곳에 올라가려하면 떨어지면 다친다는 설명을 한다. 위험한 물건을 만지려고 하면, 미리 숨겨 두거나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여러 번 가르쳐 주면 된다. 그러나 처음에, 투석에 대해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무척이나 난감했었다. 우리는 여러 번의 난감한 설명의 시간들을 보내고, 실수들을 반복하면서 해결단어를 찾기에 이른다.
바로 “배속 치카치카” 였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는 치아를 닦는 치카치카라는 단어와 배가 결합된 최고의 합성어였다. 최소한 우리에게는. 그리고 또한, 문을 닫는 상황을 설명하는 것도 중요했다. 그래서 하늘에게 네가 들어가서 먼지를 피우면, 이모 배가 아프다고 얘기해 주었다. 여러 번 설명하고 또 설명해야 했지만, 그것은 절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이를 이해시킬 만한 말을 찾았고, 아이가 이해할 수 있다면 무엇이 더 필요 하겠는가?
이렇게 아이를 이해시킬 단어와 설명들을 찾기 위해, 나는 나의 상황을 계속 생각했고, 상황을 설명할 단어들을 끊임없이 떠올렸다. 또한 이 상황에 맞는, 일상 속 공통분모를 찾아내야 했다. 이런 과정들이 아울러, 나의 인간관계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 같다. 왜냐면, 전에는 투석을 싫은 것으로만, 회피하고 싶은 것으로만 여겼지 정작, 투석을 정확히 들여다보지 않았는데, 아이 일을 계기로 나를 더 돌아보고, 투석을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투석을 하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일자리를 구하는 과정에서, 힘들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무엇이 기본인지 모르겠지만, 기본적인 잣대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그 기본적 잣대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을 마치 문제라도 있는 듯 대한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을 피하기만 하고, 난처한 상황이 닥치면 먼저 포기하는 것을 선택 했었다. 하지만 아이를 위해 투자한 긴 고민의 시간들을 통해, 나는 자신을 바꾸고, 더 용기를 내게 되었다. 그래서 좀 더 솔직히 상대에게 나의 상황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함에 적극성을 띌 수 있었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께 상황을 설명하지 못했던 나의 용기 없음과, 친구들에게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늘 주눅 들어 있던 내가 떠올랐던 것이다.
어렸을 때, 나는 움츠려들기만 했다. 하지만 성인이 된 후에 큰일을 겪으며, 가족들의 아낌없는 보살핌과 뜨거운 사랑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조금은 마음을 열 준비가 되었다. 그리고 비록, 나의 경험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불가능 할지 모른다는 전제하에, 나의 가장 소중한 언니의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인 생명탄생을 지켜보는 그 경험은, 나에게도 감동 그 자체였다. 아이라는 선물은 우리 가족에게 큰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또한 나는 예쁘고 귀여운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약한 아이를 보살피면서, 내가 누군가를 돌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더불어 내 자신이 보잘 것 없다는 생각으로 먼저 용기내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상대를 위하는 진심으로, 먼저 손 내밀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자신보다 아이를 더 위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갈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중요한, 힘들고 아픈 시간들 속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했던, 바램. 바로 이식수술. 물론, 수술 후에도 많은 부작용과 거부반응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럼에도 투석보다 나을 테고, 완전한 치료가 없기에 최선책이 아니, 차선책에 불과 하지만, 언제나 수술 받기를 기도했었다. 그 꿈과도 같은 기적이 마침내 이루어진다.
2016년 5월 21일 늦은 밤, 6번째로 뇌사자 이식 수술을 받게냐는 이식코디의 전화. 5월 22일 오후 수술실 입실. 그렇게 꿈에서만 그리던, 이식 수술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기적 그 자체였다. 내가 이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소중하고 고귀한 경험을 하게 되다니, 상상도 못할 꿈만 같았다. 그저, 수술 받을 수 있음에 감사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었다.
비록, 개복수술은 살을 찢는 고통을 동반하게 마련이지만, 그래도 너무나 바래왔던 일이기에 어마어마한 인내로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 그리고 수술 후에 면역력이 현저히 떨어지기에, 조심하고 금기해야 할 사항이 아주 많다. 그 중에서도 어린 아이를 몇 개월은 만나지 말라는 사항도 있다. 당분간 조카를 볼 수 없다는 말은 슬프기도 했지만, 그래도 행복한 기다림이었다. 왜냐하면 이식수술을 받은 나는 모든 것이 용서되고, 다 좋아 보이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고생한 부모님께도 너무나 감사 드렸고, 엄마자신도 얼마나 기쁘고 흐뭇해하시던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행복하다.
그리고 몇 개월 후 드디어, 조카를 만났다.
2016년 9월. 몇 달 만에 만난 조카에게
“이제, 이모 배속 치카치카 안 해도 된다!” 라고 말했더니,
“왜? 나랑 더 많이 놀아 주려고?” 라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귀여운 아이 얼굴을 보고, 어른들은 흐뭇한 미소와 함께 코끝이 찡한 감동을 느꼈다. 나도 나를 올려다보는 아이 얼굴이 너무 예뻐 꼭 껴안으며 행복의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누군지 모를 누군가가 남기고 떠난, 숭고한 정신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온 마음을 다하여…….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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