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시론] 가을 풍경에서 행복을 찾다

폭염은 시절에 쫓기어 후년을 기약하며 떠나갔다. 가을밤 무르익는 밤길은 풀벌레 소리들로 풍경을 수놓고 달 빛 은은한 깊이는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전한다.
때는 조선 숙종 임금시절 미복차림으로 이곳저곳을 미행하고 있던 숙종은 허름한 작은 오두막집 앞을 지나는데 집안에서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양반들이 사는 기와집 동네를 지나면서도 듣지 못했던 웃음소리에 숙종은 어리둥절하여 그 까닭을 알아보기 위해 오두막집에 들어가 주인에게 물 한 사발을 청했다.
그 사이 숙종이 문틈으로 방안을 자세히 살펴보니 방안에는 수염이 허연 할아버지가 새끼를 꼬고 있었고 올망졸망한 어린아이들은 짚을 고르고 있었으며 할머니는 빨래를 밟고 있었고, 부인은 옷을 깁고 있었다. 그런데 가족들의 얼굴들이 모두가 어찌나 밝고 맑은지 도무지 근심 걱정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숙종은 주인에게 물었다. “사는 형편이 어려워 보이는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소? 밖에서 들으니 이곳에서 웃음이 끊이지 않더이다” 주인은 희색을 띤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 “이렇게 살아도 빚도 갚아가며, 저축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절로 웃음이 나는 가 봅니다.”
궁궐로 돌아온 숙종은 금방 쓰러질 것 같은 오두막집에 살면서 빚도 갚고 저축도 한다는 말에 궁금증의 풀리지 않았다. 다음날 숙종은 신하를 시켜 어젯밤 그 집에 감춰진 재물이라도 있는지 조사해 보라고 하였지만 그 집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숙종은 다시 그 집을 찾아가 주인에게 전에 했던 말의 뜻을 물었다. 그러자 주인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부모님 공양하는 것이 곧 빚을 갚는 것이고, 제가 늙어서 의지할 아이들을 키우니 이게 바로 저축이 아니겠습니까.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으니 저절로 웃음이 나올 수밖에요”
우리는 어느 정도 돈이 있어야 만족할 수 있을까? 돈이 많으면 행복할 수 있을까? 어느 정도 생활이 편리해질 순 있겠지만 부자는 더 큰 부자를 부러워하고 더 큰 부자는 더욱더 큰 부자를 부러워할 것이다.
진짜 부자는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을 기적이라 여기며 때때로 좋은 음악을 듣고, 향기로운 꽃에 매혹되는 사람, 살아 있는 것에 감사하는 사람,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음에 즐거워하는 사람일 것이다. 우리가 평소에 사소한 것으로 생각한 이것이 바로 행복이며, 어떤 부족함도 없는 마음의 ‘진짜 부자’인 것 같다.
옷을 짓는 때는 작은 바늘이 필요한 것이니 비록 기다란 창이 있다고 해도 소용이 없고 비를 피할 때에는 우산 하나면 충분한 것이니 하늘이 드넓다 하여 따로 큰 것을 구할 수고가 필요 없을 것 같다.
그러므로 작고 하찮다 하여 가볍게 여기지 말고 그 타고난 바와 생김에 따라 모두가 다 값진 보배가 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인간의 욕구, 권력욕과 신분상승의 두 욕구를 누르는 데는 법과 제도로는 고쳐지기 어렵다고 본다. 스스로에게 늘 물어야 한다. 법과 제도는 욕망의 용광로에선 무용지물이기에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진정한 가치는 어디에 있는지 인간 본래의 바탕에 깔린 공손함과 검소함을 중요 덕목으로 삼아 자기 성찰이 절실히 필요한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요즘 매스컴을 통해 접하는 공직자들의 모습에서 청렴함과 공평무사함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심지어 자신의 이익이나 부를 이루기 위해 온갖 허언도 마다하지 않는다. 허언임이 밝혀지고 비리가 드러나도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실수였다”, “잘 몰랐다”는 변명으로 일관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과거 경제 발전만이 최고의 가치였던 우리 사회가 겪어야 할 필연인지도 모르겠다. 성과지상주의로 치닫다보니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과정의 모든 어두운 면이 미화되고 심지어 이를 숭배하는 집단도 생겨날 정도로 우리 주변은 공직자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성과만을 중요시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중에 “끝이 좋으면 다 좋아”라는 유명한 희곡의 제목이 어쩌면 우리 사회의 단면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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